마크 샤갈. 무제. 연대미상. 프린트. 33x25cm



마크 샤갈/ Marc Chagall/ 1887~1985

.....러시아에서 태어났지만 성인이 된 후, 대부분의 시간을 프랑스에서 보냈던 마르크 샤갈은 평생 고국을 그리워했다. 샤갈이 남긴 글 가운데, 다음의 글은 매우 유명하다. "러시아 제국도 소련도 모두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나는 신비에 싸인 낯선 사람일 뿐이다. 아마도 유럽이 나와 나의 조국 러시아를 사랑해줄 것이다." 이와 같이 샤갈이 자신의 이중 국적에 대해 지녔던 생각과 감정은 그의 삶과 작품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샤갈은 회화뿐만 아니라 도자기와 스테인드글라스 작품도 제작했다. 또한 그는 판화, 무대 연출, 벽화에도 정통했다. 일부 비평가들은 샤갈이 너무나 다양한 미술 분야에 손을 댐으로써 그 예술적 깊이가 얕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 아름다움은 사실 이러한 다양성에 있는 것이다. 샤갈이 입체주의 미술을 접한 것은 1910년 파리에서였다. 그가 이 시기에 제작한 많은 작품들은 입체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보여준다. 대표적인 예로 <아폴리네르에게 바치는 경의>(1911~1912)와 <일곱 개의 손가락을 지닌 자화상>(1912)을 들 수 있다.

.....샤갈의 첫 개인전은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얼마 전 베를린에서 열렸다. 그는 그 후 고향인 비테프스크로 돌아갔다. 1917년에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고, 그 이듬해에 샤갈은 비테프스크에 있는 미술학교의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이 영광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고, 실망한 샤갈은 모스크바로 떠났다. 처음에 샤갈은 혁명을 열렬히 지지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실망과 환멸을 느끼게 된 그는 다시 파리와 베를린으로 돌아왔다.

.....그는 중동 지방을 여행한 후, 프랑스에 정착하기로 마음먹었다. 중대하고 비극적인 뭔가가 일어날 것만 같다는 불안과 공포를 느끼며 샤갈은 몇 해를 보냈다. <백색의 예수의 수난>(1938)과 같은 작품들에서 샤갈의 이런 두려움이 잘 나타나 있다. 1941년, 나치 군이 파리를 점령하자 유태인이었던 샤갈은 어쩔 수 없이 미국으로 피신했다. 그는 1948년에 프랑스로 돌아와 리비에라에 집을 짓고 정착했다. 그는 계속 세계를 돌아다니며, 종종 중요한 공공 작품의 제작 의뢰를 받아 작업을 하곤 했다. 1973년 니스에 샤갈에게 헌정된 미술관이 문을 열었다.

.....샤갈은 어린 시절부터 여자 친구였던 부유한 상인의 딸 벨라 로젠펠트와 1915년에 결혼했다. 그들의 행복한 결혼생활은 많은 그림들의 영감이 되었다. 그는 벨라를 비테프스크에서 만났는데, 이 마을은 그가 작품에서 지속적으로 다뤘던 주제이기도 하다. 벨라는 샤갈의 그림에 자주 등장했다. <생일>(1915), <술잔을 들고 있는 이중 초상>(1917) 등에서 벨라의 초상을 볼 수 있다. 벨라는 1944년 뉴욕에서 죽었으나, 그녀에 대한 기억은 샤갈의 작품들에 계속 영감을 주었다. 그녀가 죽은 후 샤갈은 우울한 몇 해를 보냈다. 그는 버지니아 해거드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으나 결혼을 하지는 않았다.

.....▶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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