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 23.0x33.0cm/ 해바라기. 37.0x25.0cm/ 산수. 19.0x22.0cm



이인성/ LEE IN SUNG/ 1912~1950

....."이래도 저래도 나의 천직은 그림을 그린다는 신세인 만큼
.....그림 속에서 살고 그림 속에서 괴롬과 함께 사라진다는 것은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나는 누구에게도 자기의 개성을 짓밟히기는 싫다."


.....'흰 벽(白壁)에 걸린 그림 한 폭이 무한한 기쁨을 줄 때도 있고... 흰 벽에 걸린 그림 한 폭이 무한한 괴롬을 줄 때도 있다. 나는 흰 벽에 그림을 떼고 흰 벽을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미친 사람 같이 멀거니 바라본다. 나는 과거에 이십여평 되는 넓은 화실에서 자유로운 분위기를 갖추어가며 그림을 그린다는 것 이외는 아무 것도 생각하는 여지도 없이, 매일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는 직공적 생활을 해왔다."

.....한국 근대 화단에서 약관의 나이로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해 혜성처럼 나타난 아소(我笑) 이인성은 1930년대 일제 강점기에 '조선의 지보(支寶)' '양화계의 거벽(巨壁)'으로 불리며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1050년 비운의 총기 오발 사고로 세상을 떠난 이후 그는 역사의 뒤안길에서 점차 대중으로부터 잊혀져 가는 작가가 되고 말았다. 그의 작품과 예술세계는 그 동안 몇 차례의 추모전과 유작전을 통해 일부가 공개된 적은 있으나 작가가 심혈을 기울인 대작들과 예술성 짙은 현존 작품들이 대대적으로 한자리에 전시될 기회는 많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비슷한 연배의 이중섭과 박수근 등이 구민적 화가로 부상하는 동안에도 조선미전 연속 6회 입선(1931-1986) 이후 불과 26세의 나이로 추천작가에 올랐던 이인성에 대한 일반인의 인지도는 높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이나 화단에서는 그의 천부적 재능과 조형적 감각에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있다.

.....특히, 이인성이 우리 근대 화단의 신미술 도입과 정착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작가로서 맨 앞자리에 설 만하다고 여겨지는 이유는 첫째, 초창기 근대 화단에서 수채화가로서의 감각적인 기량과 기법의 숙련으로 탁월한 예술적 업적을 일구어냈다는 점, 둘째, 능수능란한 기량으로 정물화나 풍경화도 많이 제작하였지만 특히 인물화에서 한국적인 인물 표현을 정립하였다는 점, 마지막으로 서양의 인상주의나 후기 인상주의의 화풍을 나름대로 발전시켜 향토적인 서정주의의 한 전형을 이루었고, 해방 이후 그의 향토적 소재와 화면구성, 색감 등이 박상옥ㆍ류경채 등 여러 작가들에게 영향을 미쳐 50년대부터 70년대까지 국전(國展)의 한 지류를 형성하였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 '조선 양화계의 거벽 천재화가 이인성' 홈페이지에서 발췌.



Copyright (C)2022. This website is copyrighted by AB GALLERY KOREA. All rights reserved.

Since June 22, 2002